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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2-05-20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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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하 박사와 함께하는 인문기행----⓵

기사입력 2021-08-17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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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이규하, 공자)
본지는 마서면 도삼리 출신으로 국내 서양학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이규학 전북대 명예교수의 다양한 논문을 수회에 걸쳐 게재할 계획이다. 공자·맹자의 핵심 유교 사항을 비롯해 도교와 도교사상, 석가모니와 불교 등에 관한 이규학 박사만의 해석과 수준 높은 글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편집자 주>

공자·맹자(孔子·孟子)의 핵심 유교 사상
중국의 사상가들 중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공자(孔子)는 아마도 지상의 모든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일 것이다.
필자는 서양 학자들의 연구와 함께 비교적(比較的)인 관점에서 공자와 유교에 관해 쓰려고 한다. 필자가 굳이 비교적 관점에서 공자와 유교에 관해서 기술하려고 하는 이유는 이것이 역사, 사상 등의 연구에 있어서 인기 있는 학문적 방법론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양 사람으로서 너무 서양에 대해서만 쓰면 지루하고 동서양을 함께 설명하면 그 의미가 보다 정확하고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필자가 특별히 공자·맹자의 사상과 유교에 대해서 쓰게 된 이유들 중 하나는, 일찍이 토인비(A. Toynbee)가 비교적 입장에서 BC 5~6세기를 우리 인간의 정신사에서 획기적인 축(軸)의 시기로 보았는데, 그 주역의 한 사람이 공자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필자가 유교적 가풍 속에서 성장하였고 서양학을 택한 것도 서양만을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양의 것을 배워 우리나라에 소개하려는 것이었기에 틈틈이 서양의 것을 우리의 것, 동양의 것과 비교하면서 공부하여 왔기 때문이다.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혼탁한 우리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 개선방안을 모색해 보기 위해서이며, 나아가서는 태고의 이상적 사상에 빠져 보고 싶은 심미적(審美的)인 관점에서이다.
또한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직접적인 이유는, 아래의 몇 가지 예(例)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유교와 공자의 사상에 관하여 자신들의 부분적, 단편적 지식과 함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전반에 관해서 체계적으로 모르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에서 이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외에도 회갑 논총 증정식에서 단상에 오른 주인공이 답사에서, 논총(論叢)의 글들 중에서 “다른 글들을 못 읽을지라도 이규하 교수의 <공자와 유교사상>은 꼭 읽어보라”고 권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이 곳 한 문학관장 C 명예교수(유명 시인)는 “이 글이 비록 간략한 내용이지만 유교 전반에 관해서 매우 잘 설명해주고 있다“라고 했다. 끝으로 필자가 재직 33년간 가르쳐 온 <서양 사상사 강의> 시간에 많이 인용한 서양의 유명한 철학자 스퇴리히의 󰡔세계 철학사에서 모두에 나오는 제목이 중국의 공자(孔子)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유교에 대한 단편적 지식이란, 그 한 예로, ①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은 유교의 옛 가르침에서 나온 말로서 남녀가 일곱 살이 되면 한 자리에 같이 앉지 않는다는 뜻으로, 남녀를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는 말이다. ②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인용하는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송나라 때, 대유학자로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가 쓴 권학문(勸學文)에 나오는 내용으로,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사회적인 순서와 질서가 있음을 일컫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상하의 질서가 흔들리지 않고 반듯하게 유지되어야 올바른 사회가 유지된다는 뜻이다. ③ 소년이노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은 쉽게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 매우 짧은 시간이라도 헛되이 보내지 말라), 미각지당춘초몽(未覺地塘春草夢; 연못가의 봄풀이 채 꿈을 깨기 전에), 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 계단 앞 오동나무 잎이 가을을 알린다). 이것 역시 주자의 권학문에 나오는 글이며 중학교 때 한문 시간에 배운 기억이 있다.
 ④ 또한, 대학 교수들 간의 대화에 이따금 등장하는 조금은 까다로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이것은 논어[論語; 중국 사서(四書)의 하나로 공자와 그 제자들의 성행(性行) 논설을 편집한 책]의 처음 구절이다. 즉,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공자가 말하기를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군자이다).
⑤ 이밖에도,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삼강오륜(三綱五倫, 유교 윤리에서의 세 가지 기본 강령과 다섯 가지 실천적 도덕 강목)이라는 말이 있다. 전한(前漢) 때 유학자의 대표적 인물인 동중서(董仲舒)로부터 유래되고,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 기본 윤리로 존중되며 지금도 우리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윤리 도덕이다. 삼강은 3가지 강령으로,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이며, 그 뜻은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그리고 오륜은 󰡔맹자󰡕(孟子; 사상가 맹자의 언행을 기록하고 인의(仁義)의 도덕을 강조하였으며 모두 7편으로 구성됨)에서 나오는 말로,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5가지로, 차례로 그 뜻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는 친애,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 부부 사이에는 범치 못할 인륜,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상에서 나열한 단편적인 공자의 사상과 유교를 이해하고 암기하는 것은 공자의 사상과 유교를 전체적,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므로 필자는 다음에서 보다 더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그리고 그 전반에 관해서 기술하려고 하며, 이것이 유교의 전통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 공자의 출생과 생애
정치가로서 활약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대신에 부수적으로 택한 교육자로서의 직업을 통해서 전대미문의 성과를 거둔 공자의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로 가장 옳다고 보는 출생연도는 기원전 552년이고 사망한 해는 기원전 479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양의 문헌에 따르면, 모든 사상가들 중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하는 공자의 나이 72세는 72세에 맞춰서 출생 년과 사망 년을 조정하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72라는 숫자에 맞추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 노나라 양왕 21년, 주나라의 영왕 20년에 해당된다. 출생지는 노(魯) 나라 평창향 취읍(陬邑)으로 오늘의 곡부(曲阜)에 해당되고 수수(洙水)를 등에 지고 사수(泗水)가 앞에 흐르는 우리에게 매우 가까운 느낌이 드는 산동반도 근처에 있다.
아버지의 이름은 숙량흘(淑梁紇),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이며, 3세에 아버지를 잃어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고 일반적으로 적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서양의 문헌에는, 전승에 의하면 “공자의 조상은 춘추시대 송나라의 지체 높은 가문에 속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보다 구체적으로, 하버드 대학의 라이샤워 교수는 그가 세습적인 권세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나 교육을 받은 사람이며, 따라서 아마 하층귀족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그 시대의 많은 가문과 마찬가지로 공자의 조상은 정치적 이유로 고향을 떠나야만 하였고, 공자는 한때 신분에 어울리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지만 빈곤해진 상황 아래서는 스스로 생계문제를 해결해 나가야만 하였다.
공자는 총명하고 도의에 통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도(道)를 행한 즉 생지안행(生知安行)한 사람은 아니었고,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침식을 잊고 공부할 정도였으며 역(易)을 전심으로 읽었다고 한다. 배움에 있어서는 하문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일찍이 “3인이 행하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물에 대해서 많이 알고 기억력이 좋아 박문강기(博聞强記)란 수식어가 붙었으며, 고금의 전적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학식이 매우 광박(廣博)하였다고 한다.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자란 공자는 한 귀족의 가축관리인직을 맡은 바 있고, 5년간 주나라 제도를 연구한 끝에 돌아온 46세 때 정공(定公)이 중도재(中都宰)란 벼슬을 맡겼고 점차 승진하여 4년간 대사구(大司寇)라는 대신 급의 관직을 맡기도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벼슬을 별로 한 적이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
56세 때 조국을 떠나 유세(遊說)하였지만 그의 주장이 용납되지 않아 정치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고국에 돌아와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실망한 플라톤(Paton)과 비슷하게 나라의 사정이 좋아질 때까지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하여 교육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가르침의 대의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지식이 곧 덕(德)이다”라는 말과 같이 “참된 앎만이 부패와 혼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하였고 공자는 앎 가운데서도 태고에 대한 앎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공자는 전통의 예를 드는 데 있어서 결코 지치지 않는 가운데, 나는 다만 전하는 것이고 새로 만들지 않으며, “나는 충심으로 옛 것을 사랑한다(Ich liebe das Alte von Herzen)” 하여 옛 질서의 부활을 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원전 484년에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 것을 보고 행림(杏林)에 단(壇)을 만들어 후진들을 가르치는 한편 저작에 종사하여 요 ․ 순의 뜻을 조술(祖述)하고 선왕의 도를 후세에 전하였다. 그의 저술에는 시(詩) ․ 서(書) ․ 예(禮) 등이 있고, 노나라의 연대기적 역사서인 󰡔춘추󰡕를 지었으며, 󰡔주역󰡕의 효전(爻傳)을 지었다. 문하생이 3천 명이나 되었는데 그 가운데 육예(六禮중국 주대에 행해지던 교육과목.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에 통한 사람이 72인이었고, 특히 안회(顔回) ․ 계로(季路) ․ 자공(子貢) 등 10인을 공자의 십철(十哲)이라 한다.
공자의 도는 그의 생시에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뒤에 한나라 무제의 표창을 거쳐 지금까지 2천 4백여 년 동안 중국사상계를 지배하여 왔다. 후일 군주들은 공자에게 벼슬을 봉하고 왕과 성(聖)이라고 일컬어 지극히 존경하였으며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유교의 큰 영향을 받아 고래로 공자묘를 건설하고 석존대제(釋尊大祭)를 계승하여 왔다.

3. 유교 철학의 특징
공자의 유교사상의 특징은 플라톤이 내세를 인정하고 영혼불멸(靈魂不滅)을 주장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인간과 현세의 실제생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리하여 그의 이론과 윤리 및 형이상학은 완성된 체계를 갖추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특별한 훈련으로서의 철학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제자들에게 사고의 보편적 법칙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역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칸트(I. Kant)의 말과 비슷하게, 논리의 추상적 규칙을 잘 아는 사람이 가장 훌륭하다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은 순수한 이성적 존재가 아니며 순수한 이성적 지식이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또한 공자는 신령과 천(天)을 충분히 인식하고 ‘천’에서 유래하는 사명감을 나타내기도 하였으나 형이상학의 일반적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된 형이상학을 남겨 놓지는 못하였다. 예를 들면, “한 제자가 죽음에 관해서 물었을 때, 현재의 삶에 대해서 모르는 우리가 어찌 죽음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신을 존숭(尊崇)할 것을 권하였으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현재 중심적이고 내세에 관해 관심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도와 서양에서 신에 대한 지배적인 관심과는 분명히 대조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공자는 주나라의 예법을 부흥시키려고 생각하였고 주공을 이상으로 삼아 몽매간에도 잊지 못하였는데, 그의 새로운 사상은 인(仁)이었다. 즉 그의 기본적 윤리정신은 ‘인’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인이란 인(人)자와 이(二)자가 합쳐서 이루어진 것으로 두 사람 내지는 여러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며 인격 대 인격을 말하는 것이다.
인은 개인의 구원(救援)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모범적 행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인(仁)은 인(人)으로서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는 뜻이며 사람과 사람이 서로 친해서 화평한 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의 본질은 친애(親愛)의 정(情)으로서 가장 강하고 순진한 것은 부자간의 애정이요, 형제간의 우애이며, 따라서 인의 실행은 부자 ․ 형제에게서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다.
공자의 근본 사상임과 동시에 또한 그의 이상이기도 한 인은 자신도 자처하지 않고 경원하였던 것이며, “성(聖)과 인을 내 어찌 감히 하랴”라고 말하였다. 역대 인물 중에서 인에 이른 사람은 요․순․우․탕․문․무․주공(堯 ․ 舜 ․ 禹 ․ 湯 ․ 文 ․ 武 ․ 周公)이었고 그밖에는 징자(徵子) ․ 기자(箕子) ․ 관중(管中) 등이고, 그의 제자 중에서 인에 이른 사람은 안회(顔回)뿐이었다. 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 동안 인을 버리지 않았으나 그 나머지 제자들은 한 달 또는 하루 밖에 ‘인’을 지키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공자는 인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인을 하는 방법만을 말하였으며 그 방법도 일정하지 않고 묻는 사람에 따라 달랐는데, 어느 때는 “사람을 사랑하라” 하였고, 또 어느 때는 “어진 자는 그 말이 눌(訥)하다” 하였으며, 다른 때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즉 이것은 개인적인 수양 면에서 본 것이지만, 인은 광의적으로는 사람의 본질이며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보기 때문에 도덕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증자가 인은 공자의 일관된 도로서 충(忠) ․ 서(恕)라고 하였다. 충은 행함에 있어 믿음을 가지고 하는 것(충성)으로서 수기(修己)에 속하고, 서는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을 생각하는 동정적인 것(용서)으로 치인(治人)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자의 사상은 도덕과 정치를 일환으로 함으로써 온 인류가 영원히 평화적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사상이다.
 다음으로 공자가 중요시 한 것은 예(禮)였는데 예는 외형적인 구속에 의해서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었으며 또한 개인생활에도 강한 구속력을 가진 일종의 기본형식이다. 그리고 예를 중시한 공자의 사상은 현실을 중심으로 하였기에 여타의 문제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자로 통하고 있으며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중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경천사상(敬天思想)은 기독교와는 다르게 비개성적인 힘을 믿는 것으로, 즉 인격적인 신(神)을 믿고 있지 않았지만 죽은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인 입장이었고 정성을 다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륜을 지키게 되는 것이 되고 복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공자는 예의와 의식을 매우 중요시하여 제자들에게 의식의 규정을 준수할 것을 지시하였다. 즉, 그는 군자(君子, 지배자의 아들, 고귀한 사람, 교양 있는 사람, 신사)에 필요한 자격을 내적인 덕(德)에 그치지 않고 문(文)과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불마(不磨)의 옥(玉)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직(直)하여도 예의(禮義)로써 절제하지 않으면 조포(粗暴)해진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후대에 의식과 예절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서양에서는 경시되고 있는 외적 형식의 실천에 의한 내적 태도의 훈도(薰陶)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종교적인 확신에서 나온 것인지 또는 옛날부터 내려온 관습을 보존코자 하는 보수적 입장에서 나온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아무튼 오랫동안 노나라의 왕들에 의해서 유교의 질서가 잘 유지되어 오다가 마침내는 공자가 강조해 온 주나라 초기의 의식으로부터 이탈현상이 일어나 사회질서가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권력의 전위(轉位), 즉 왕권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공자에게는 개개의 이탈이 전체질서를 혼돈상태에 빠지게 한 것을 의미하였다.
물론 공자는 소인배적으로 의식에 꼼꼼히 매달리는 것은 아니었고 또 옛 사고 기준의 재수용을 통해서 질서의 확립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이보다는 전통적 의식으로부터의 이탈이 사회의 혼란을 야기할 위험이 크므로 공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요소를 본래의 전통적 이론에 흘러들어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음호에는 성선설을 기초로 한 도덕적 개념 등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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