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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2-08-11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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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하 박사의 인문학기행

기사입력 2022-07-0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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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토인비의 주요 역사관 및 기독교적 역사관

1)토인비의 주요 역사관(슈펭글러의서양의 몰락과 양안적 역사관과함께)

토인비의 역사관 역사이론 및 역사철학을 이해하려면 그의 󰡔역사의 연구󰡕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에 앞서 그의 사상의 바탕이 되어 있는 그의 역사철학적 정신을 탐구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그의 역사철학적 정신은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서양()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landes)의 저술로 또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바 있는 독일의 철학자·역사학자 슈펭글러(Oswald Spengler)에 커다란 대립을 보여주고 있다[필자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과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2년간 1급 연구교수로 연구한 외에 독일어권에서 3회에 걸쳐서 연구한 바 있다. 첫 번째는 비엔나대학교 유학시절에, 두 번째는 독일 초대 공화국 대통령 에베르트 재단의 연구비로 독일분단과 슈펭글러의 서양의 몰락을 그리고 세 번째는 우리나라 대표 격으로 선발되어 한국 교육부·학술진흥재단 연구비 지원으로(체재비·연구비·왕복 항공료 포함) 주로 본(Bonn)대학··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독일통일에 대해서 연구한 바 있음]. 슈펭글러의 방법론이 천재성을 바탕으로 한 관조적인 통찰로부터 나온 주관적 독단적이 된 데 대하여 토인비는 관조에 근원을 두고 있긴 하지만 학술적 가정을 다른 전문가들과의 토론을 통하여 비판적 경험적으로 입증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의 역사철학은 독일 역사이론을 멀리하는 대신에 진보와 자유주의를 주창한 헤겔(F. Hegel)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생의 약진(elan vital)과 창조적 진화를 주장한 프랑스의 베르그송(H. Bergson)으로부터 커다란 자극을 받았다.

이밖에도 토인비는 슈펭글러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들였지만 슈펭글러의 연구가 범위가 너무 협소하고, 사실을 등한히 하였으며, 문명의 성쇠(盛衰)에 관해 적절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였고 너무나 비관적이라고 비판하였다.

다음으로는 보다 구체적으로 역사의 연구의 내용에 직결되어 있는 그의 역사관에 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토인비가 역사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영국 최초의 역사학 전공 여학사(女學士)인 어머니와 명저 산업혁명사를 남긴 백부였다. 또한 시야에 들어온 전체 세계의 역사를 전경적(全景的)으로 기술하는 역사의 포괄적 연구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해준 사람은 헤로도토스와 폴리비오스였다.

토인비는 그의 󰡔역사의 연구󰡕 마지막 장에서 󰡔역사의 연구󰡕 집필 동기에 관해서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호기심이란 일반적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변동이 격렬한 시대의 사회에 대한 호기심을 말한다. 그러나 호기심만으로는 위대한 역사가 탄생하지 않으며 이 호기심은 당시대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움직여 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토인비가 지적으로 크게 성장할 때는 19세기의 낙관론과 진보사관이 뜻밖에도 좌절당하고 19세기의 세계질서와 가치체계가 돌연 와해되기 시작한 시기로서, 사람들은 왜 이런 사태가 야기되었느냐고 질문하게 되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답은 역사가의 몫이었으며 토인비의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그러한 물음에 대한 답의 하나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토인비가 제1차 세계대전을 스파르타와 아테네간의 동족상잔의 전쟁인 펠로폰네소스전쟁과 비교하였고, 1차 세계대전 뒤의 세계문제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본래 그리스 로마의 문학, 철학 및 역사에 관해 철저한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전후 신문사 특파원으로서 그리스-터키전쟁을 취재하였고 30년간이나 왕립 국제문제연구소의 한 책임자로 일해 온 경험 때문이었다. 즉 토인비는 유일하게 고전의 권위자요 동시에 현대 문제의 권위자로서 이중의 권위자라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흔히 역사가들은 과거에 빠져 현실문제에 무관심할 뿐 아니라 오히려 현실적 관심을 역사가의 타락으로 간주하여 상아탑 안에서 고고하게 과거를 연구해 왔고 또한 그래야만 객관적 과학적 역사학이 가능하다고 보아왔지만 그런데 토인비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처럼 열정적으로 공부하였던 고전시대를 상아탑에서 보지 않고 현대사로부터 바라보았으며 과거와 현대의 역사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비록 영국의 위대한 현대 역사이론가 카(E.H. Carr)가 문명단위 역사를 비판했을지라도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 것처럼, 이것은 현대의 역사와 과거의 역사를 별개의 역사로 보지 않고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토인비의 역사학은 고전시대를 현대세계로부터 바라보고, 현대세계를 고전시대로부터 바라보는 양안적(兩眼的) 사관(史觀)’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헤겔이 행복한 시대를 백지(白紙)로 보며 고통과 변화의 시대를 이성적인 것으로 보았듯이, 토인비의 역사학은 조용한 연구실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고 있는 현대의 격변과 와중에서 형성되는 것으로서 혼란기가 역사가를 위해서 보고(寶庫)가 되는 것이었다.

2) 토인비의 심오한 기독교적 역사관

그러면 마지막으로 학계로부터 자주 신랄한 비판을 받아왔던 그의 기독교적 역사관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토인비의 역사의 의의(意義)에 관한 정의를 보면 많은 사학자들의 일반적 주장에 비해 매우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보통 협의의 의미에서 역사를 사적 영역을 제외한 공적 사건만을 다루는 것과는 다르게, 토인비는 광의(廣義)의 의미에서 전체 현상계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계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주를 주재하는 신(하느님)이 그 부분에 해당하는 인간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며, 그가 지나치게 기독교적 신앙심에 입각해서 역사를 이해하고 있다는 비난도 바로 그의 이러한 주장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토인비가 그의 저서 제6권에서 현대인이 신에 복귀하면 서양문명은 구제받을 것이다라고 희망을 피력한 데서 잘 입증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협의적(狹義的) 역사의 이해가 바른 길을 택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실로 이제까지 우리가 해온 바와 같은 공·사 사건의 구분이라든가, 인간적·비인간적 현상계의 구분은 우리의 권한 밖의 일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체 현상계가 하나로 되어 있어 나눌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토인비는 역사는 전체로서 관찰할 때 오류를 범하지 않게 되는 것이나, 인간의 정신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를 부분으로 나누어서 관찰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고, 그 중에서도 인간생활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정치사를 가장 중요시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정치사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하였으며, 지난 5천 년간의 정치사가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한 연극(演劇)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새로운 나라가 나타나면 낡은 나라가 사라지고, 한 나라가 정벌하면 다른 나라는 정복되고, 대제국을 만들기 위해 소국가들이 해체되고, 대국가들이 해체되면 소국가들이 다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정치생활은 흥망을 거듭할 뿐으로 인간이 여기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면은 테크닉과 비슷하게 일정한 방향을 향하여 지속해 왔다고 보았다.

우리 인류정신사에 있어서 불변의 획기적 사건은 인간이 자신의 관조적 신앙을 통해서 인간보다 위대한 정신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와 접촉을 가지려고 애써왔으며, 이와 조화 속에서 살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정신생활에 있어서 가장 위험하고도 가장 큰 죄악이 되는 것은 자기중심적 사고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집단적 에고센트릭(egocentric)이며, 예를 들면 미국, 소련, 중국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따라 인간역사의 의미의 유무가 판가름된다고 보았다.

4. 문명공동체 이론과 문명의 발생·성정·몰락·해체(세계국가·세계교회)

1) 문명을 단위로 한 역사이론

역사를 한 민족, 한 시대 한 분야에 관한 연구로부터 떠나 세계사적 관점에서 기술하려고 하는 시도는 토인비 이전에도 있어왔다. 설화, 문학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 역사에 과학성을 부여하여 역사를 비판적 실증사학의 위치에 올려놓아 근대 비판사학의 비조로 불리는 랑케L. Ranke)가 인류의 공동생활의 원리를 기초로 한 제 민족의 세계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실제 세계사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세계사는 유럽중심의 유럽을 세계로 하는 세계사였고, 세계사를 구성하는 부분들은 국민국가였으며, 역사연구의 단위 또한 국가와 정치세력을 신이 기초가 된 개별성으로 보는 국민국가였다.

그런데 토인비는 민족주의의 영향 하에서 탄생한 국민국가가 역사연구의 단위가 아니라 문명공동체가 단위가 되고 최소한 ‘21개 문명들이 동렬에 서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문명들과 똑같은 가치와 원리를 갖는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발전이란 종족의 천부의 소질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중심 사상이 철저히 배제된 서구인의 지적 정신적 혁명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이것은 신의 우주 창조와 지배라는 기독교사관의 단일성에 걸맞은 것이며 그의 세계사는 역사시대의 반만 년의 시간과 지구 전체의 공간을 통합시킨 것이다.

역사학이 불확실한 문학적 서술에서 벗어나 실증적 과학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프랑스혁명을 이끌었던 합리적 계몽사상에 뒤이은 19세기의 낭만주의 사조에서 비롯된 것이며, ‘개별성특수성의 가치를 숭상하는 낭만주의가 역사학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역사학은 낭만주의에서 중시되고 있는 민족중심의 풍조에 기울어져 각 국가마다 자국이 강국이 되어 여타 국가를 지배하고 역사적 세계의 중심이 되는 것처럼 기술하였으며 민족주의가 야기시킨 국제적인 비극적 분쟁에 관해서는 무관심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같은 비극을 촉진시키는 국가주의적 역사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토인비는 이같이 편협한 역사연구 태도를 패로키얼리즘(Parochialism)이라고 하여 단호히 거부하고 독자적인 역사연구의 태도를 새로이 수립하여 민족이나 국가를 단위로 하는 대신에 문명권을 연구의 단위로 설정하였다. 또한 본인의 회갑논총에 기고한 무엇이 독일을 단합시키는가?’로 인기가 높은 베를린 자유 대학의 슐체(H. Schulze) 교수는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한 책자에서 괴테의 권유와 비슷하게, 독일의 정치 문화는 전 시기를 통해서 유럽의 정치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오늘의 문화에 대한 새로운 강조에서와 같이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의 역사만 보아도 그 관계가 매우 밀접해서 전체적 역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전체의 부분 국가의 역사의 이해가 결코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올바른 인식을 가능케 하는 영역을 문명권으로 하고 세계의 모든 역사를 문명권으로 나누어 그것들을 상호 비교하면서 각자의 발생, 성장, 붕괴, 해체의 과정을 살펴보는 한편 그 문명권 상호간의 횡적 또는 종적 상호관계를 규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전문적, 직업적 역사가들로부터의 강력한 비판이 등장하고, 아예 토인비를 역사가라는 범주에서 쫓아내려는 운동이 일자 토인비의 역사학은 역사가들보다는 일반인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켜 더 알려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세기의 역사학이 18세기의 합리주의적 역사서술에 대한 반박 내지는 수정으로서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토인비의 역사학은 20세기가 직면하고 있는 도전(challenge)에 대한 응전(response)으로서의 산물(産物)이었다. 토인비는 역사를 현재에서 유리시켜 현재의 이해관계의 관심에서 떠나 과거를 이해함으로써 일면성 특수성 자주성을 확립하고자 주관주의에 빠졌던 역사주의’(歷史主義) 입장과는 달리, 현재를 과거 속에서 그리고 과거를 현재 속에서 살려 과거와 현재가 하나가 되는 역사학을 계획하였다. 따라서 철학적 동시성의 역사의식이 토인비 역사의식의 본질이 된 것이다. 이럴 경우에만 고대의 그리스 이집트 인도 멕시코 문명이 오늘의 우리에게 생동감을 주며 과거와 현재가 하나가 된 속에서 조화로운 미래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토인비는 19세기 사학의 특징인 자연주의적 법칙적 결정론 및 실존주의 역사학에 맹공격을 가하고 배격하였다. 그것은 결정론적 법칙이 적용되는 영역은 물질과 자연의 현상이며, 정신적인 존재인 인간에게는 자기 결정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의 전편에 걸쳐서 시종일관 가능성의 실현이 방향 잡혀 있고 철회할 수 없는 숙명으로 보는 슈펭글러의 사상과는 대조적으로, 역사의 연구를 결정론 숙명론의 입장에서 해방시키려고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역사의 연구내의 발생, 성장, 쇠퇴, 해체 또한 성쇠의 법칙적 결정론이라는 뜻밖의 비판에 곤혹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이에 대한 답변에서 인간생활의 자유 필연 영역의 경계선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쪽으로든 이동시킬 수 있으며 자유와 필연 중 어느 영역을 확대시키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역사를 돌이켜 보면 역사적 사건들은 자유의지에 컨트롤 될 수도 있고 맹목적 힘에 지배될 수도 있는데, 후자가 우세할 경우 역사는 자연법칙의 지배하에 들어가 패턴과 규칙성을 보여주게 되고, 전자가 우세하면 자유분방하고 자발적이며 융통성 있는 전진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의 기본이 되어 있는 도전과 응전의 참된 뜻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그는 인간 역사의 무한한 자료와 역사가 합리적이기도 하고 비합리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즉 역사가 어느 정도는 일리아드(Iliad)’적 성격을 띠고 있어 한정된 언어로 무한의 직관을 줄 수 있는 표현이 필요하며 역사가는 동시에 위대한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게 되었다. 즉 역사가는 사실의 확인과 기록 외에 창조적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법칙적 과학이 도저히 발견해낼 수 없는 역사의 의미가 토인비에 의해서 회복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자 (scshinm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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